Books and Catalogues

‘운치’에 빠지다 Falling in ‘unzi’

Admin
18 Apr 2023
Views 260

‘운치’에 빠지다 

Falling in ‘unzi’


심은록(SIMEunlog MetaLab연구원, 미술비평가)





나타남의 운치 

이번 전시에 김형기, unzi Kim 작가는 ‘운치’(韻致, charme, picturesqueness) 있는 작품을 내놓았다. ‘unzi Kim’이라는 이름은 작가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 그의 프랑스 친구들이 ‘김형기’라는 이름이 어려워서 ‘unzi Kim’으로 부르며 자연스럽게 얻어진 작가명이다. 이러한 사정을 미처 몰랐던 필자가 그의 작가명을 처음 봤을 때 ‘unzi 운치’로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작업이  <노래하는 물방울> (Water drop Singing, 2018)처럼 점점 더 운치가 가미되고 있다. 봄의 미세먼지와 여름의 폭염을 힘들게 이겨낸 우리들, 이제 가을 초엽에 서서 운치unzi에 흠씬 빠져들자.

어느 시인은 ‘비가 오면 밝은 날 가보지 못한 마음속의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했다. 차분해지기도 편안해지기도 하는 빗방울 소리는 우리의 마음을 젖어들게 한다. 슬플 때는 비에 흠씬 젖어 걸어 다니면 슬픔도 함께 씻겨 나가는 것 같다. 빗소리는 신기하게도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클래식 음악으로,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즈 음악처럼, 각자 좋아하는 장르의 음악으로 들리는 신비함이 있다. 이러한 비와 빗소리가 이번 김형기의 작품 <노래하는 물방울>에서 재현된다.

<노래하는 물방울>은 올라퍼 엘리아슨의 ‘날씨 프로젝트’를 떠오르게 했다. 엘리아슨이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인공 태양(‘날씨 프로젝트’, 2003)을 설치하자, 수많은 관람객들이 인공 태양 아래에서 산책을 하거나, 바닥에 누워 일광욕을 하기도, 누워서 천장의 거울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작품 속에 하나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기도, 오손도손 둘러앉아 담화를 나누기도, 커플들은 서로 포옹을 하기도, 때로는 흥미 넘쳐난 관람객은 춤을 추기도 했다. <노래하는 물방울>도 충분히 큰 규모가 가능한 작품으로, 데이트 모던보다는 작가가 유학했던 천창이 모두 유리인 그랑 팔레(파리)와 같은 공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천창에서는 맑은 태양이 내리쬐는데, 실내에서는 비가 내린다. 작가는 떨어지는 시간과 물의 양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운치를 느끼게 할 수 있다. 한곳에서는 보슬보슬 이슬비가 내리고, 다른 곳에서는 소낙비가, 또 다른 곳에서는 연못처럼 잔잔한 풍경으로 관람객들이 나르시스가 되게 한다. 이번 MHK 갤러리 전시에서는 이 다양한 모든 양상을 한 작품 속에 담은 셈이다.

이처럼, ‘유사 자연현상’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은 함께 체험함으로써 공유 가능한 공적 감정과 깊은 감정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공동체적 감정을 공유한다. 미술은 오래전부터 자연을 그림에 재현해 왔다. 또한 6, 70년대에는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아르테 포베라, 모노하, 특히 랜드아트 미술운동을 통해 자연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매개로 설치미술을 통해 이제 자연과 인간의 인터랙티브가 더욱 적극적이 되었다. 관람객들은 비록 인공적으로 제시된 자연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연의 긍정적인 면모가 재현되기에, 마음 놓고 자신을 노출하고, 실재의 경험보다 더 적극적이고 집중적인 체험을 가능케 한다. 특히 예술을 통한 이러한 유사 자연현상은 오늘날과 같이 환경문제가 심각한 경우에는 노스탤지어와 함께 경각심을 일으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기대하게 된다.


공(空)의 물, 빛의 물

미셀 푸코는 « 가스통 바슐라르는 서구 인식론 전체를 덫에 걸리게 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바슐라르의 사상이 지금까지의 서구의 전통 철학을 재고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다. 마치 푸코가 그동안 지적 논의에서는 터부였던 ‘성’을 인식론의 대상으로 집어넣었듯이, 바슐라르는 서구 인식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였던 4 원소(물, 불, 공기, 땅)를 통해, 고전철학에서 도외시해왔던 상상력을 인식론의 대상으로 집어넣었다. 그 뒤 모노하, 랜드아트, 아르테 포베라 등의 미술운동을 거쳐 현재까지 예술가들은 4 원소를 통한 상상력을 시각화시키고 때로는 청각화 촉각화 시키고 있다. 김형기 작가의 경우도 그의 작업을 쭉 살펴보면 이러한 4 원소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빛(불)을 연상케 하는 <eclipse>(1993), <Field of Light>(1994), <Square - distorted space>(1994), <I‘m the Light>(2009) 등, 물을 연상케 하는 <noyé>(1991), <Venus of Willendorf>(2005), <Blow>, 등. 또한 공기를 상징하는 <HooH>(2018), <Souffle>(2001 이 작품에는 ‘불’도 사용됨), 그리고 마지막으로 <The Half>(2014)는 땅의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4 원소 하면, 빌 비올라의 <Martyrs>(2016) 4부작이 바로 연상된다. 미디어 아트를 하는 작가는 작업의 특성상 빛을 좋아하며, 김형기의 작품에도 빛을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너무나 빠르고 예민한 빛의 특징 때문일까? 그 반대로 물을 좋아하는 미디어 아티스트들도 종종 보게 된다. 대다수의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물을 빛처럼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형기는 ‘물’을 공간감 혹은 여백으로 표현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빌 비올라와 김형기의 물의 표현을 비교해 보자. 빌 비올라 역시, 4 원소 가운데 물을 가장 즐긴다. 하지만, 두 작가의 물에 대한 표현은 반대라고 할 정도로 그 느낌이 다르다. 빌 비올라의 <Martyrs>(2016), <Ascension> (2000), <Lovers>(2005), <Inverted Birth>에서 물은 폭력적일 정도로 강하게 재현된다. 빌 비올라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은 다수의 경우 서서히 움직이기에, 인간의 움직임과 그 보다 빠르게 움직이는(쏟아지는) 물의 시간이 분명하게 이원론적으로 구분된다. 두 시간이 대비되기에 그 효과는 배가된다. 빌 비올라는 쏟아져 내리는 물의 속성을 비디오를 역행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물로 재현한다. 그렇게 물의 방향은 하늘로 향하지만, 다른 오브제나 신체(특히 젖어있는 머리카탁)는 여전히 땅을 향하고 있다. 빌 비올라의 작품에 익숙한 관람객들은 역행된 비디오를 다시 역행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때로는 물이 아니라 빛이 쏟아지는 느낌, 시간성의 강조 때문인지 공간감의 느낌은 줄어든다. 

반면에 김형기의 작품은 마치 시각화된 동양화의 여백을 보는 듯하다. <Be-ing-Space>(4 LCD Panel, Computer, 190 x 80x 80 cm, 2012) 작품은 이미 제목에서 공간 SPACE가 강조되고 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같이 흐른다. 그리고 이 공간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작가는 LCD 패널 4개를 작은 수조의 느낌이 들도록 설치했다. 마치 짙은 안개로 시계가 10 센티미터도 되지 않아 때로는 팔의 일부만 보였다가 때로는 몸의 일부만 보이기도 한다. 마치 산수화에서 산의 일부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묘미, 산과 물 사이에 여백만이 놓여 있는데도 그 사이의 공간에서 관람객은 넉넉히 유희하며 상상한다. 운치란, 근사하게 나타날 때보다, 미묘하게 사라질 때 그 여운이 오래 남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Arisa 5.5>(2018), <Vapor>(2018)은 물론, 이전의 그의 많은 작품에 이 같은 공간감과 나타남과 사라짐의 미학이 연출되고 있다. 

빌 비올라는 백남준의 제자이며, 동양문화, 특히 한국의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며, 김형기 역시 발 하나는 유럽에 담그고 있는 느낌이 둘 정도로 서양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있다. 이 두 작가 모두 동서양의 예술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에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뿌리 깊은 문화와 전통의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 현대 이전의 서양미술사는  ‘빛’의 미술사, 동양미술사는 ‘여백 혹은 공(空)의 미술사’라고 할 수 있다. 서구에서 많은 신들이 ‘빛’, ‘광선’, ‘번개’ 등으로 상징되었으며 , 르네상스부터  ‘빛’의 재현은 원근법과 함께  그 표현 방식이 체계화되고 보편화된다. 반면에, 동양은 ‘공(空)’ 즉 ‘여백’을 중요시 여겨 왔다. 빛의 발원지(예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창문, 불, 태양)가 표현되는 경우는 드물고, 가끔 달이 표현되기는 하나, 이는 빛의 발원지라기보다는, 심성적 표현이다. 광원이 표현되지 않다 보니, 한국화의 작품을 보면 빛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 수 없으며, 물체의 입체감을 드러내는 명암이나 빛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그림자 역시 재현되지 않는다.


사라짐의 미학

김형기 작가의 지금까지의 개인전 제목들을 보면, Be-ing, See-ing, fall-ing과 같이 가운데 붙임표(- 또는 하이픈)가 있다. 붙임표 없이 바로 Being, Seeing, falling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붙임표를 사용하는 이유는 –ing 즉 진행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붙임표에 의해 우리는 제목을 좀 더 느리게 읽게 된다. 느림의 미학, 여유의 미학이다. 서서히 그러나 꾸준한 움직임이 있는 작가의 작업의 전반적인 인상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나타남과 상승의 미학뿐만 아니라, 사라짐의 미와 떨어짐의 미학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플라톤 이래, 우리는 나타남, 영원함, 상승의 미학만 이야기해 왔다. 이제 용감하게 그 반대되는 사라짐, 유한성, 하강(falling)의 미학도 인정하고 가꾸어야 할 때 임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이 전시는 보여주고 있다.  (2018.9.9. 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