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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am Padam展, 기획: 심은록, 2023. 3. 9~31, 두손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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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Ap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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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am Padam展

재불작가전 1 : 진유영, 윤희, 김춘환, 이진우, 이수경, 유혜숙

 심은록 (전시기획가, SimEunlog MetaLab 연구원)


“Draw a straight line and follow it.”-La Monte Young‘s Composition 1960 #10


두손 화랑(대표 김양수)은 서울특별시 기념물인 역사적인 건물인 옛 구세군중앙회관 (등록일. 2002.03.05)에 위치해 있다. 중앙 현관의 붉은 벽돌조의 외관을 배경으로 서있는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4개 원주가 돋보이며, 단단하고 당당하다. 건립 당시 서울의 10대 건물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잘생긴 이 건물은 유럽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그에 화답하듯 ‘빠담빠담’展 (2023. 3. 9~31)이 개최된다. 바로 재불작가 6인, 진유영, 윤희, 김춘환, 이진우, 이수경, 유혜숙의 전시가 펼쳐진다. 이곳에서 전시한다는 것은, 마치 백남준이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머리카락이 쭈뼛 쭈뼛 곤두선다. 실제로 화랑 이층에는 근사한 백남준(M200)이 '텃구렁이'[1]처럼 제대로 자리잡았다. 그 아래 층의 전시실에서 프랑스적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6인의 전시가 펼쳐진다. 


프랑스적 공통점인 ‘차이’ 

가장 프랑스 적이라는 것은 이들 작업이 6인 6색으로 ‘차이’를, 그것도 미학적으로 뛰어난 ‘차이’를 각각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도불 이유와 목적도 각양각색이다. 진유영 작가는 제 1차 미술부문 프랑스정부 장학금을 받고 1969년에 도불했으며, 윤희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유롭게 예술을 하기 위해 1986년에 도불, 김춘환은 유럽 각국의 “다양한 작가들의 특성들을 접해보고 싶어서 1995년에 파리를 선택”, 이진우는 79-82년 계엄령하의 휴교의 암울함 하에 1983년 도불했다. 그리고, 이수경은 불문학을 전공해서 자연스럽게 1988년에 프랑스와 인연을 맺었고, 유혜숙은 익숙하게 들은 미국과 일본보다는 프랑스가 더 낯설기에 1987년에 도불했다. 이후 이들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 작업 과정, 등 각각 다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도불한 진유영 작가는, 프랑스에서도 ‘회화의 죽음’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남불에 정착한다 시기적으로도 그 절정에 달해서 젊은 작가들은 너도 나도 브러쉬를 내팽개 치는 시기였다. 회화의 죽음은 그의 존재감마저 해체 시켰다. 오랜 고민과 고통 끝에 그는 회화를 축소시키기 보다는, 다른 매체와의 소통을 통해 “회화를 확장”시킨다. 마찬가지로 타자와의 교류로 그의 존재도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영상과 캔버스의 Dialogue를 통해 회화를 확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심장이 뛰고 있다. 회화가 살아서 계속 성장하고, 움직이고, 미지의 세계를 끊임없이 개척하고있다.

윤희는 끓는 금속 용액(800도~1300도)을 열린 주형 안에 부어 굴리며 작업한다. 주물은 주형안에서 자유로우며, 그 자유만큼 외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일반적으로 오랜 준비 과정은 조수나 보조자가 맡고, 결정적인 피날레의 순간은 작가가 개입하는데, 윤희는 이마저 뒤집으며, 피날레의 순간을, 오히려 피날레이기에 더욱더 외부의 개입에 열어놓는다. 그렇게 주물공장의 조건, 금속재질, 온도, 용액을 던질 때의 모든 상황, 우연성과 위험성도 그대로 작품에 개입된다. 주형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각각의 작품은 모두 유니크하다. 그는 “닮은 꼴이 거푸집 수준”이라는 격언을 무색 하게하며, “고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었던 ‘닫힌’ 주형의 개념을 확장하여, 21세기에 어울리는 조각의 차원을 연다.”[2] 

김춘환의 작품제목 <Undercurrent>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현실세계는 바다의 표면처럼 (Current), 수많은 정보, 전쟁, 기후, 등 갖가지 소식들, 수없이 쏟아지는 SNS등 쉼없이 요동친다. 그 아래에는(Under), 때로는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며, 해저바닥을 지탱하는 심해도 있다. 그의 작업과정도 이와 똑같다. 그는 한 작품에 수천장의 광고나 잡지의 이미지(종이)를 캔버스에 일정한 패턴으로 무작위로 구겨서 붙인다. 요동치는 현실세계와 같다 (Current). 그리고 표면의 파도를 걷어내듯이 커터 칼로 절단을 하는 과정에 종이 본연의 색인 흰색이 드러나면서, 인쇄된 갖가지 다양한 색들을 통일감있게 지탱한다(Under). 그 과정에서 작가의 시공간적 조건과 제스처가 스며들어간다.  

이진우의 작업은 그의 신체를 갈아 넣어 만든 또다른 ‘몸’이다. 그는 작업은 아크릴 용액을 흠씬 머금은 천 위에 확장된 ‘먹’으로써 ‘숯’을 뿌리고, 그 위에 한지를 덮고, 쇠 브러시로 문지르고 긁어낸다. 그리고, 또다시 한지를 입히고 다시 쇠브러시로 문지르며 긁어 내기를 수십 번 반복한다. 강도높은 신체 노동 그 자체이다. 전통 한국화에서는 한지 위에 먹으로 그린다면,  그는 역으로 숯(먹)으로 표현하고, 한지로 덮어 나간다. 그의 작업과정은 한국 나전칠기 장인들의 부단한 노고와 힘든 과정이 연상된다. 그렇게 제작된 작업은 사람들에 따라 거친 땅, 혹성, 화산재가 덮힌 풍경, 등 다양한 심적 상태 시각적 풍경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제목은 ‘무제’인데, 이는 한국화의 ‘여백’과 같이 관람객들이 각각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고 느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이수경 작가는, 오래전 필자와의 인터뷰 중에 «소설의 내레이션이 싫었고, 시의 상징적이며 순결한 언어가 좋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어쩌면 작가도 잊었을 이 언급이 계속 머리 속에 회자되는 것은, 그는 화폭 위에 그 만의 언어로 시 쓰기를 계속하며 그 언급을 상기 시키기 때문이다. 꼴라쥬처럼 보이지만, 전체 혹은 부분부분 여러 레이어를 중첩하며 아크릴로 그렸다. 모티브는 다양한 색의 선들로 층층이 겹쳐져 있다. 그는 그림 그 자체가 “귀찮아 할 정도로 흔들어 된다”. 순수한 초록색 모노크롬 바탕 위에 알 수 없는 형태(모티브)로 흔들어 되고(HOVA, 2021), 노란색과 파란색 바탕을 대비시켜 긴장시키는 것도 모자라, 강렬한 검은색의 모티브와 같은 모티브 아래로 예상치 못한 깊이있는 다색의 모티브가 두둥둥 떠오르며 흔들어 댄다 (HOB/J, 2021). 

지금까지 많이 알려진 유혜숙의 작업은 검은 색조였다. 차라리 실재 머리카락이나 털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로 그의 작업은 한올 한올, 입자 하나가 무수히 반복되고 중첩된다. 수 없는 그 터치는 그의 현존이고 시침(時針)이었다. 이번에 전시하는 작품은 물감과 붓을 다시 사용한 블루 작업이다. 블랙에서 끄집어 올려 정화시킨 블루 톤에는, 연장은 바꾸었을지라도, 그 동안 단련하고 반복했던 흑연의 섬세함이 그대로 펼쳐진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우리의 오랜 관념은 ‘빛’이 신비, 두려움, 낯설음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는데, 실은 ‘어두움’이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반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작가가 흑연과 블랙톤으로 셀 수없이 무수한 현존의 터치를 단련하고 견디어 왔기에 가능하다.

이처럼 6인의 작가는 마티에르에서 테크닉까지 각각 놀라운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창의성을 중요시 여기는 예술이기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하며, 차이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 프랑스가 ‘예술의 나라’라고 불리는 것은 이 차이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폭이 넓다는 의미이다. 마치 딥러닝의 파라미터(parameter)가 많은 것과 같다. 역사상으로도, 프랑스 문화가 찬란했던 시기는, 차이를 잔뜩 몰고온 외국인들과의 동거가 원활할 때였다. 반대로, 이러한 다양성이 억제 될 때, 프랑스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고유성과 힘을 잃었다. 이는 아주 단순한 논리인데, 인간은 체험에 의거하여 사유하는 닫힌 구조이기에, 외부와 소통하는 만큼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상기 6인 작가들이 우연성과 외부의 개입에 상당히 관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의 오랜 ‘차이의 역사’라는 배경이, 질 들뢰즈가 “차이”의 사상을, 자크 데리다의 “차연 différance”을 가능하게 했고,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국적 신체성

6인의 참여 작가의 ‘차이에 대한 존중’(cf. parameter)은 프랑스的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볼 수 있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들의 신체와 품성은 원산지가 한국이다. 이 작가들은 수 겹에서 수십 겹의 레이어를 사용하고, 조각마저도 강도높은 신체의 위험성을 담보로 제작된다. 시공간의 제약을 온몸으로 그대로 받으면서 지독하게 신체를 소모하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단색화가 한국적인 중요한 근거이자 특성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신체성’에 있다. 그 뿌리는 나전칠기, 단청 등을 하는 조선 장인들이나,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말처럼 서예의 한 획을 제대로 긋기 위해서는 수십년을 노력해야 하는 그러한 전통에서 온 것이다.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중국은 그 결과물을 거의 신적인 경지로 마무리한다면, 한국은 일부러 비틀어서 인간 혹은 자연의 경지에 머물게 한다는데 차이가 있다.

마침내, 이 전시의 제목인 “Padam Padam 빠담 빠담”에 대해서 설명해 보자.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 1915~1963)의 유명한 샹송인, ‘빠담빠담’에 대한 정의를 찾으려고, 로베르 사전(Robert Dictionnaire)을 비롯한 몇몇 사전을 찾아보았으나 목록에 없었다. 몇몇 프랑스 지식인에게 물으니, “파리라는 도시에 붙은 별명인 ‘Paname’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도 하고, “랄라라”처럼 의미없이 붙여진 후렴이라고도, 하물며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라고도 한다. 그러면, 뜻이 아니라 ‘빠담빠담’이라는 의성어의 느낌을 말해 달라고 하니, 한 작가는 “살아있는 소리”라고 하고, 또다른 이는 ‘노래가 뛰어오는 소리’라고 한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고민스러운 삶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직선 하나를 긋고 그것을 따라가라”

상기 문장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1935~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의 〈컴포지션 1960 10번〉의 연주 내용이다. 이 컴포지션은 20세기 최고의 근사한 질문 중 하나이다. 예술가들에게 이 곡의 연주를 요청하면, 수많은 결과가 나올 수 있고, 그들 예술의 특성과 미학까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백남준이 너무나 빨리, 너무나 근사하게 대답해버린 바람에 다른 작가들의 대답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의 화답인 <머리를 위한 선(禪)>[3]은 꾸불꾸불 매화줄기 같기도, 건필로 쓴 전서(篆書)같기도 하다. 서양의 ‘선line’은 개념적이지만[4], 동양의 ‘선線’(동양화에서는 좀더 정확히는 ‘주름’)은 신체적이다. 그리고 동양화나 서예에서 ‘선線’이나 ‘획劃’을 오랫동안 훈련하는 것은 마치 ‘선禪’과 같다. 백남준은 ‘선’(線)을 ‘선’(禪)이라고 바꾸며, 한국말로 언어유희까지 덧붙였다. 만약 로베르 사전에 ‘빠담’의 의미가 정의되었다면, 동양화에 여백 ‘없는’ 그림처럼, 여러 가능한 뉘앙스가 사라졌을 것이다. 

백남준을 알기 전에, 〈컴포지션 1960 10번〉을 연주했다면, 직선(直線) 하나를 곧게 그린 후, 서서 이 직선을 따라가는 것으로 연주(퍼포먼스)를 마치지 않았을까. <머리를 위한 선(禪)>은, 마치 파라미터가 더 생긴 것처럼, 더 근사한 ‘차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처럼 우리의 삶을 창의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을 알려주는 것이 예술가이다. 백남준이 그랬 듯이, 그리고 6인의 작가들이 부단한 노력과 신체성을 바탕으로 ‘근사한 차이’(작품들)를 보여주었듯이, 이들의 작업을 관람하면서, 마르셀 뒤샹의 말처럼, “우리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자!”[5]


[1] 한국에서 구렁이는 재물이나 집을 지킨다는 '텃구렁이'는 ‘업구렁이’라고도 불리며, 긍정적인 존재이며, "생태계의 복덩어리"이다. 현재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돼 있다. 

 

[2] 심은록, “21세기식 ‘열린 주형’, in 윤희 'non finito' 전시도록,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 2022-04-06 ~ 2022-07-10.

 

[3] 이 퍼포먼스는 1961년 10월 26일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과 마리 바우어마이스터가 함께 기획한 《오리기날레》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그는 이 퍼포먼스의 결과로 남은 흔적을 같은 제목의 평면 작품으로 남겼다.

 

[4] “선(線)이란, 폭이 없는 길이(length)이다.”  - 유클리드 기하학. 

 

“폭이 없는 ‘길이’(length)란, 개념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부피를 가질 수 없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점법, 선법, 등은 실제 자연에서 가져온 체험적인 것이다.” – 심은록, “화가 김종학 연구, 선과 주름”(2023년 발간예정).  

 

[5] Marcel Duchamp : « Faisons de notre vie une œuvre d’art »